한국에는 두가지 화교가 있습니다. 구화교와 신화교. 구화교는 대만국적자 신화교는 조선족
이렇게 나뉘어 진 데에는 두 화교를 대표하는 정체성에서 차이가 있기 떼 문입니다.
대만 국적자만 가입할수 있는 한성 화교 협회.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해외 통전공작의 일종으로 전 주중대사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중국 재한 교민협회 입니다.
여기서 중국 재한 교민 협회가 좀 어디서 본 거 같다고 생각 되는분이 있을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불법경찰" 논란이 된 왕해군이 대표로 있는 단체 입니다.
그리고 화조센터와 그 이름만 들어도 예상이 되는 한화 중국 평화 통일 촉진 연합 총회 라는 이름에 단체 대표도 맞고 있죠.
왕해군이 이 협회에 2대 회장으로써 1대 회장인 한성호는 제가 불법 경찰이 있기전에 여기서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사드 반대 운동과 위대한 중국 혁명군 어쩌구 저쩌구 . 한국전쟁 당시 죽였냐 살렸냐 하면서 같은 조선족과 싸우던 거)
한성호는 조선족으로써 문화 대혁명 당시 공산당에 의해 대지주 라는 이유로 부모님이 대들보에 목 메어서 죽고 자기 자신은 경찰에 고문 당한후
탈출을 해서 남한에 정착후 한국전쟁 당시 대만으로 피신해서 국민당 정보기관에서 일한후에 다시 한국으로 와서
재한 화교 반공 구국 총회 대표로써 활동하가 친중파로 돌아선. 나름 드라마 틱한 사람 입니다.
(참고로 이건 썰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같은 조선족이랑 싸울때 쓴 기고문에 글입니다)
왕해군도 참 드라마틱 한게 한성호 회장일 당시부터 말이 많았습니다.
한성호 회장은 국민당에서 활동도 하고 중국에서 어렸을때 안좋은 일도 당하고 그리고 반공 단체도 조직해서 운영 하던 사람인데.
그냥 한국에서 중국에 영향력이 높아지자 전향을 한거니. 공산당 입장에서 믿음이 가겠습니까?
그래서 감시자 역활로 붙인게 왕해군 이었죠.
그리고 한성호가 죽자 그 자리를 세습하는데. 공산당 픽 이어서 그렇지 얼마나 뒷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일단 한족도 아니고 조선족도 아니고 만주족에다가. 부인도 조선족이며 20년간 한국에 살았는데 한국말도 못합니다.
(인터뷰를 중국어로 한 이유가 그냥 한국말을 못합니다. 뭐 자기 딴에는 잘 못한다고 하는데. 그냥 못합니다 )
그리고 조선족도 아니고 연변에 거주한 적도 없는 사람이 재한 조선족 연변 자치주 동향회 회장까지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분위기 험했는데. 조선족과 한족은 한국사회에 포섭 당할 기회가 있다고 뜬금 없이 회장 자리에 왕해군을 픽했는데.
이번에 불법 경찰로 한번에 나락까지 가서 지금 분위기가 말이 아닙니다.
물론 이는 공산당의 한국 사회 통전 조직의 일부라는 것.
다음에 시간이 되면. 한국에 있는 조선족 단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계획적으로 통전 공작을 수행하는지 써볼까 합니다.
무조건적으로 짱깨는 차단하고 결국엔 멸망시켜야함
자기 자식들한테 동북공정식 짱깨 역사 가르침 혜택은 한국인으로 받아먹고 사고방식이나 역사관, 충성 대상은 중국임...
조선족 보다는 화교가 깨끗한데 그 화교 가지고도 저 난리치는데 말 다했죠. 스파이는 중국이 제일 문제임
애초에 짱깨랑 엮이면 좋은게 없음 끊어내지 못하면 거리라도 둬야 하는데 무제한으로 유입하는게 말이 되냐구요.
제가 예전에 쓴글 입니다. 와우!!
문화대혁명이 1966년인데 문화대혁명으로 부모가 죽고 한국으로 도망와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만으로 피신을 해서 국민당 정보기관에서 일을 했다고요?
무슨 주장을 하시려면 좀 말이 되는 주장을 하세요.
댁 같은 분들 때문에 조선족이 본인들은 잘못도 없는데 억울하게 매도를 당한다느니 헛소리를 하는 것임.
1945년, 나 한성호는 19세 때 일본이 투항하고 중국 국민정부가 승리하자 동북이 해방되었음. 당시 나 한성호는 동북 길림사범대학 2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교의 수업이 중단되자 고향인 길림성 장백현으로 돌아갔다.
1946년 나 한성호가 20살이 되던 시기 동북에서는 대혁명으로 대지주와 부농을 타도하는 유혈적인 투쟁이 개시되었으며 나의 가정은 선참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택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부친과 형제 몇명도 사처로 도망갔으며 모친은 대들보에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나 한성호 역시 그 폭풍을 피해가지 못하고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죄명이란 첫째, 대지주의 아들이고 둘째, 위만주국 시대의 대학생이란 것이었으며 셋째, 51 폭동의 주모자(주: 제3조의 죄명은 순전히 날조된 것이었으며 1984년에 이르러 해명되었음)라는 것이었다.
후에 나 한성호는 친척 및 친구와 중공간부의 비밀도움으로 탈옥(越狱)하여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도망하기에 성공하였고 1948년에는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건너갔으며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로 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1949년 당시 23살인 나 한성호는 한국 서울에서 신문을 발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성호는 한국에서 철거하는 화교들을 실은 선박 “영송호(永淞号)에 승선하여 대만으로 피난, 6개월 뒤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이어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그 때로부터 국민당에서 사무를 보면서 생활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비록 한국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한국을 떠나지는 않았고 지금까지 70여 년간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1년 25살인 나 한성호는 재한 중국 국민당 직속지부의 조직훈련과 과장으로 사업, 겸임으로 재한 대만 대도통신사(大道通讯社) 특파원 및 재한 화교청년 반공항러구국총회(反共抗俄救国总会) 총회장(주: 재한 국민당 직속지부의 조직일군들로는 다음과 같다. 주한대사 왕동이 이 지부의 당무지도원으로 최고의 권력자였고 비서로는 여규생, 과장으로는 나 한성호였고 간사는 우천덕이었다. 당시 3명씩으로 하나의 소지부가 되어 당무 및 교포사업을 하였는데 국민당의 해외지부는 근근히 간판효과만 있었을 뿐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으로 사업하기도 했다.
1952년 나 한성호는 당시 왕동 주한 중화민국 대사 및 국민당 지부 지도원의 추천으로 대만에 가서 중국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제 20기 당무훈련반에 참가, 당시 원장은 장개석(蒋介石)이었고 학원생은 300명이었으며 1개월을 한기(주: 대북 양명산에서, 부록 1: 동창록 등 문건, 참고)로 되어 있었다.
일단 1946년에 무슨 동북에서 대혁명이 있었다는 건데...
저 대혁명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게 1966년에 있었더 문화 대혁명은 아니죠.
글 원문이 사실이라고 해도 동북 지역에서 지주들에 중국 공산당에 의한 숙청을 저 사람이 대혁명이라고 쓴 것임.
설사 대혁명이라고 해도 그게 어떻게 문화대혁명이 됨?
대만 대도통신사(大道通讯社) 특파원?
검색해보니 대도통신사는 대만 정부가 최초로 승인한 통신사로 설립일이 1988년이네요.
1988년 생긴 통신사를 1951년에 되다니?
심지어 주한 중화민국 대사를 보니...
제1대: 사오위린 (邵毓麟, 1949년 7월 14일 ~ 1951년 9월 4일)
제2대: 왕둥위안 (王東原, 1951년 9월 13일 ~ 1961년 2월 11일)
1951년 당시 주한 중화민국 대사는 왕동위안 한국어로 왕동원이지 왕동이 아님.
1952년 당시 혁명실천연구원 원장도 장개석이 아님.
그냥 조선족이 쓴 글을 아무런 검증도 안하고 믿고 그나마도 엉터리로 본인이 해석해서 엉터리 글을 퍼트리고 있으니...
조선족 말을 그대로 믿는 분은 뭔지?
한성호, 1927년 8월 2일 길림성 장백현 반절구 금화향 리천동 출생, 장백현의 첫 ... 청춘을 문화대혁명이란 특별한 시대에 보내게 되여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는 결코 불행.
1988년은 대만 계엄령이 풀린 날입니다. 대만 역사는 검색 안하셨나 봅니다.
이것도 검색해 보시면 왜 설립일이 그날 인줄 알겁니다.
왕둥 왕동 이건 뭐 의미 없는 애기네요. 무한도전을 찍은 유제석이라 해서 유재석이 아닌건 아니니.
한성호(우측)가 26세였던 1952년 9월 대만 타이베이 양명산에서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수료를 기념해 당시 연구원 원장이었던 장개석(중앙)과 함께 찍은 사진 | 자료사진
뒷말은 그냥 무시 하겠습니다 ㅋㅋ
1966년에 문화대혁명을 1940년대에 겪었다는 게 맞다고 우기고...
1988년 생긴 통신사에 1951년 직원이었다는 데도 맞다고 우기고...
공식적으로 1952년 혁명신천연구원 원장이 다른 사람이었는데도 장개석이 맞다고 우기고...
대만 계엄령 풀린 해가 1988년이라서 맞다고 우기는 게 얼마나 어이가 없는 소리냐면...
대만은 그 게임 풀린 날까지 중앙통신사라는 국영 통신사 이외에는 다른 통신사를 허가하지 않았음.
그래서 대도통신사가 그때 생긴 것임.
한마디로 그 전에는 대도통신사라는 이름으로 대만의 통신사가 존재할 수 없었음.
차라리 중앙통신사 기자였다면 모르지만 존재하지도 않았던 통신사 직원이었다니?
상관 이름 틀린게 뭐 대단한 일인가요? 그것도 90살이 넘는 사람이 반세기전 상관이름
틀린게 그렇게 잘못인가요?
1940년대 연변에서 이미 무산계급 혁명의 구호가 돌아 다니던 시절 입니다.
문화대혁명의 공식 명칭이 무산계급 문화 대혁명인건 아시죠?
내가 검색해 보니 딱 이시기에 겪지 않은 사람은 문화 대혁명을 겪은게 아니라고
피해자한테 니 말은 틀린거다 정의를 내린다? 글쎄요.
그리고 혁명 신천 연구원 원장이 다른 사람?
거기가 어딘지? 신천지 연구원인가요?
대만 계엄령 풀린 해가 1988년이라서 맞다고 우기는 게 얼마나 어이가 없는 소리냐면?
무슨 애기를 하는건지 ??